제목 [호주 포도원 기행] 올해의 와인 맛? 장미꽃에 물어봐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날짜 2012-03-30

‘포도원 기행’은 와인에 대한 천편일률적 지식이나 이론 혹은 까다로운 예법을 따지는 기존 와인 이야기와는 다르다. 호주의 유명 와인 산지를 직접 찾아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들의 인생과 와인 이야기를 담았다. 전직이 판사, 의사, 신문기자, 화가, 항공기 조종사, 철학 교수인 양조장 주인으로부터 포도농장을 하게 된 동기, 그리고 와인에 대한 독특한 인생철학과 애환, 사랑 이야기를 직접 듣고 채록했다. <편집자주>

‘헌터밸리가든 리조트’는 나지막한 브로큰백 산맥을 등지고 수많은 포도원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약 122만m2(37만 평)에 이르는 대지에는 로체와인과 식물원, 수상 골프장,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피하고 점심도 먹을 겸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오리고기를 시킨 후 그에 맞는 와인을 추천해 달라고 요리사에게 부탁했다.

“무슨 와인엔 어떤 음식이 좋다는 규칙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스테이크를 먹을 때는 꼭 레드 와인을 주문하고 연어나 굴 같은 해산물 요리에는 화이트 와인을 찾지만, 그건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 문제지 법칙이 있는 건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그 반대로 조합해서 즐길 때가 많죠. 가령 소스를 발라 그릴에 바짝 구운 베이비 옥토퍼스가 식탁에 올라왔다면 화이트 와인보다 레드 와인을 더 찾습니다.”

주방장의 말이다. 규칙은 깨지는 걸 전제로 만들기 때문에 꼭 따를 필요는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법칙이나 상식을 깨다 보면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맛이 창조된단다. 속 편하게 값도 싸고 맛도 그런대로 괜찮다는 하우스 와인을 택해 식사를 마친 후 밖으로 나오니 빗방울이 아까보다 굵어졌다. 여름을 재촉하는 비다. 북반구와 달리 헌터밸리의 11월은 바야흐로 개화의 계절이다. 수확기에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얻기를 바란다면 이때가 가장 중요한 시기다. 바로 하늘이 포도농사에 간섭하는 시점이기 때문. 만약 이때쯤 헌터밸리에 폭우가 쏟아지거나 극심한 가뭄이 들거나 서쪽 사막지대로부터 메마른 열풍이라도 불어오면 그해의 작황은 그야말로 엉망이 되고 만다.

매년 이때가 되면 헌터밸리에서는 장미축제를 열어 120여 종 200만 송이의 장미를 전시한다. 방문객은 와인에 취하고, 가슴골 깊은 여인에게 홀리며, 분분히 나는 장미 꽃잎에 어지러워진다. 그런데 탐스럽게 핀 이 장미가 헌터밸리에서는 또 다른 쓰임이 있다고 로체와인 셀라도어에서 일하는 조앤이 귀띔해줬다.

“장미는 포도나무의 병충해를 조기에 감지해 알려줍니다. 옛날부터 헌터밸리에서는 포도밭의 가장자리에 장미를 심어 잎사귀에 벌레가 자글자글 끼거나 구멍이 송송 뚫리기 시작하면 병충해가 있을 걸 예상하고 포도밭에 무슨 종류의 농약을 어느 정도 뿌릴지를 궁리했습니다. 이 때문에 포도농사꾼은 장미를 소중하게 여기죠.”

11월 날씨와 장미꽃의 상태는 그해 와인 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조앤은 딸을 둘이나 둔 엄마지만 결혼한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온종일 손님에게 시달리다 집에 돌아가면 피곤해서 곯아떨어지기 일쑤라는 그는 이곳에서 와인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봤다고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술에 취하면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이곳 헌터밸리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 가끔 나타난다. 이곳저곳 와이너리를 돌다 많이 취한 손님이 저속한 농담을 해대거나, 자신의 주량을 이미 넘어섰는데도 무리하게 와인을 더 달라고 요구해 난처하게 만든다.

11월은 꽃 피는 계절…장미꽃 상태는 와인품질 ‘신호등’

한번은 얼굴이 시뻘게진 손님이 비틀거리며 찾아와 와인을 요구하기에, 몇 번 거절하다 먼저 입을 헹군 뒤 시음용 와인을 마시게 하려고 맹물을 잔에 부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술인 줄 알고 마신 손님이 와인이 참 훌륭하다며 빈티지와 포도 종류가 무엇인지를 꼬치꼬치 캐물어 한바탕 웃었다고. 이런 사람을 두고 ‘와이노(wino)’라고 부르는데 ‘와인이라면 코를 벌름대며 참지 못하는 중독자’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와이노는 술과 물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와인을 탐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와인 지식을 강요하는 ‘와인 스노브(wine-snob)’도 문제지만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하는 와이노도 와인을 제대로 즐기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와인이란 상대가 있는 배려의 술이에요. 이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상대에게 강요하거나 다퉈서는 안 되고 너무 취해 타인에게 불쾌감을 줘서도 안 되는 거죠.”

진정한 와인 애호가는 잘 숙성된 와인처럼 성숙한 인간관계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조앤은 헌터밸리의 유명한 와인 메이커인 언니의 영향을 받아 컨설턴트로 나서게 됐다는데, 나이는 어리지만 세상 물정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포도밭의 장미꽃처럼, 산소 부족을 제일 먼저 알아챈다는 잠수함 속 토끼처럼 조앤은 한두 마디의 대화로도 쉽게 손님 성향을 파악했다.

“와인을 마시는 동안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모두들 허공에 붕 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헌터밸리는 ‘마법의 성’ 같아요. 평소 조용하던 사람도 여기만 오면 목소리가 커지고 비밀이 많은 사람도 와인 몇 잔 들어가면 술술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개중에는 와인 몇 병 사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도 있고요.”

샤도네이 와인색을 닮은 조앤의 금발은 옅어서인지 지적이며 격조가 있어 보였다. 마침 앞가슴 단추 두어개를 풀어놓아 모범생처럼 보이지도 않았으며, 계단을 오를 때도 발끝으로 한 번에 두어 개씩은 거침없이 오를 것처럼 충분히 젊었다. 여러 곳을 돌며 와인을 홀짝거린 탓인지, 아니면 그의 주술에 걸려든 건지 필자 역시 자꾸 헤프게 이것저것 털어놓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그가 말한 대로 장미꽃이 활짝 핀 ‘마법의 성’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박일원 호주여행전문칼럼니스트 bobbinhea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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